사건별조사보고서

장도원의 함흥만세운동 사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66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항일독립운동
첨부파일
장도원의 함흥만세운동 사건.pdf [10265387 byte]
 

1. 보성전문학교 중퇴와 영생중학교 교사 재직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보성전문학교 학적관계는 고려대학교 교우회학적과100년사편찬위원회 등에 문의했지만 장도원의 학적 사항을 확인할 수 없었으며, 장도원이 1907년 개교한 함흥 영생중학교의 교사 재직과 영생중학교 학력도 확인할 수 없었다.


2. 문헌조사 결과, 함흥만세운동은 총 16회에 걸쳐 2,420명이 참가하여 290명이 일제경찰에 체포되었고, 시위자 3명은 살해당하였으며, 시위자 6명과 일제경찰 2명이 부상을 당한 것이 확인되었다. 특히 함흥군에서도 만세운동 주도층은 다른 지역의 양상과 같이 농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학생과 기독교인이 큰 역할을 하였음이 추정된다.
  또한, 함흥만세운동에서의 장도원의 역할은 발굴한 판결문을 통하여 장도원이 1919년 2월 28일 함흥면 중하리 기독교 교회에서 이근재
한영호조영신홍기진이순기 등과 3월 3일 정오 즈음 함흥면 상리에 위치한 쌀시장(米市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합의결의한 것 때문에 1920년 7월 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공소(항소)했지만 1920년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유 없음으로 기각되고, 원심과 같이 징역 8월의 판결을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
  또, 발굴된 장도원 판결문과 장도원 사건 관련 동아일보 사건기사에 의하면 장도원은 함흥 만세운동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1년여 동안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예심을 받다가 함흥지방법원에서 1920년 7월 5일 제1회 공판 때 검사가 1년 6개월을 구형하였고 징역8월의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볼 때, 장도원은 함흥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7월경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판결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3. 장도원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는지 여부에 대하여, 국가기록원국사편찬위원회 등의 소장 자료 조사와 서대문형무소 자료에서는 장도원의 수형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4. 장도원이 성서조선에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글을 기고했는지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장도원은 성서조선 제26호(1931. 3.)에 「도덕에서 완전히 실패하고오라」에서 제69호(1934. 10.)에 「구약성서와 기독교」까지 총 46개의 글을 게재한 것은 확인했으나 장도원이 성서조선에 게재한 글은 기성 교회를 비판부정하고 그 교회에 속하지 않고 기독교 복음으로 귀일할 것을 주장한 무교회주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제시하였을 뿐 직접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의 글은 찾을 수 없었고, 성서조선에 게재한 글로 일제의 탄압감시를 받은 증거 또한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