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주문진지역 양봉열 외 4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90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적대세력관련
첨부파일
주문지지역 양봉렬 외 4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pdf [14945984 byte]
 

1. 양봉열, 심상열, 정계술, 오세문, 심상필이 대한청년단원이라는 공식적인 문서, 1950년 4월 6일 삼교리 신사동 심상필 집에서 무장공비 2명과 경찰 및 양봉열 외 3인을 포함한 대한청년단원들 사이에 교전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교전 중에 심상필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한국전쟁 이후 이 사건 때문에 삼교리 주민들 중 일부가 피해를 입었다는 공식적인 문서는 찾지 못했지만, 참고인 진술과 기록문서 등을 통하여 피해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한국전쟁 당시 삼교리 거주자 중 현재 생존자(당시 주문진 및 강릉 경찰서 근무자 6명, 당시 주문진 대한청년단원 3명)와 1954년 건립된 남산(강릉시 소재)의 위령탑 및 1954년 10월에 세워진 위령탑, 한청순국동지위령탑보존위원회와 강릉군순국동지합동위령제의위원회에서 각각 작성한 영위명부(靈位名簿)을 통해서 양봉열, 심상열, 정계술, 오세문이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3. 1950년 4월 6일 삼교리 무장공비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현재 생존자(3명:당시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었던 현재 주문진 거주자)를 통해서 1950년 4월 5일 삼교리 심상필 집에 무장공비 2명이 침입하여 6일 대한청년단원들과 교전이 있었던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으며, 본 사건에서 심상필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4. 이후 1950년 4월 6일 삼교리 무장공비 침입 사건으로 양봉열은 1950년 7월 15일(6.25피살자명부) 내무서(삼교리 본동 소재)에서 불러서 나간 이후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을 참고인 진술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5. 심상열은 정확한 피해날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1950년 4월 6일 삼교리 무장공비 침입 사건으로 내무서(삼교리 본동 소재)에서 불러서 나간 이후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을 참고인 진술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6. 정계술은 1950년 4월 6일 삼교리 무장공비 침입 사건으로 양봉열과 함께 내무서에 불려 나갔다는 것을 참고인 진술로 확인하였으며, 「6.25피살자명부」에서도 같은 날(1950년 7월 15일)로 확인되었다.


7. 오세문은 1950년 4월 6일 삼교리 무장공비 침입 사건으로 1950년 7월 8일(음력 5월 23일) 지방좌익세력인 정○○에게 끌려가 8월경 제장계(교항리, 현재 주문진중학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을 참고인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8.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공보처통계국, 1954)를 통하여 양봉열(당시 주소:주문진읍 삼교리 606), 정계술(당시 주소:주문진읍 삼교리 878), 심상열(당시 주소:주문진읍 삼교리 613)이 1950년 7월 30일에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납치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하였으나, 오세문의 납치기록은 없었다.


9. 제장계(堤長界)는 현재 교항리에 있는 주문진중학교 자리이며, 그 주변(주문진수산학교:주문진중학교 앞에 있는 현재 강원도립대학)에서 한국전쟁 당시에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고 참고인들은 진술하는데, 기록(강우근, "공산당 잔악행위 현장발굴 및 안보교육장화 연구"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안보연구소, 1989, 56쪽)에서도 주문진수산학교에서 1950년 7월 10일 ‘대한청년단 체포 총살’로 100여명이 사살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여 본 사건에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