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고양 금정굴 사건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209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고양 금정굴 사건.pdf [42758188 byte]
 

1. 고산돌 외 75명을 포함한 153명 이상의 고양지역 주민들이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9일부터 10월 31일 사이에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경찰관에 의해 고양시 소재 금정굴에서 집단총살 당하였다.

2. 위 사건의 경위를 보면, 국군의 고양․파주지역 수복 이후, 경찰은 지역주민 중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한 혐의가 있는 자와 부역혐의로 행불 또는 도피한 자의 가족을 연행하였다. 경찰은 이들을 관내 각 지서 및 치안대 사무실, 창고 등에 구금하였다가 고양경찰서로 이송한 다음, 3~7일간의 조사를 거쳐 10월 9일부터 한 번에 20~40여 명씩 금정굴로 끌고 가서 총살하고 암매장하였다. 이 과정에 고양경찰서 관내 경찰과 20여 명의 태극단․치안대 등 경찰보조 인력이 가담하였다. 금정굴 현장에서는 5인 1조의 경찰관 2개조가 희생자 5명씩을 굴 방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등 뒤에서 사격하여 살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3. 본 사건의 전체 희생규모는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를 포함하여 최소 153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고산돌(다-253), 최의현(미신청), 유해진(다-805), 한복영(다-804), 허정임(미신청), 정한희(다-578), 정대철(다-578), 정영학(다-574), 김석권(다-806), 이봉린(다-577), 박순조(다-432), 박순환(다-432), 한창석(다-3446), 서상용(다-249), 서병철(다-249), 서병욱(다-2317), 이규봉(다-278), 이정례(다-278), 윤영규(다-2312), 안희준(다-274), 이기철(다-6521), 김광제(다-6958), 박근식(다-2313), 박인식(다-2313), 권학길(다-6269), 최종석(다-260), 박희문(다-378), 김용남(미신청), 김영선(다-2816), 전옥자(다-2816), 이돌섭(다-275), 김천흥(다-250), 김영환(다-254), 김재환(다-254), 유희철(다-252), 안점봉(다-247), 안형노(다-247), 안상노(다-247), 안용노(다-576), 이용우(다-261), 최재옥(다-259), 최연(다-258), 최담(다-258), 박만협(다-248), 조병호(다-6065), 김진섭(다-6065), 김명산(다-6782), 방용섭(다-6782), 김만성(다-6782), 김진홍(다-357), 심기만(다-279), 심우현(다-279), 심준섭(다-279), 유필준(다-277), 노인성(다-257), 심재천(다-255), 노춘석(다-256), 홍기원(다-6982), 김상국(다-280), 김호연(다-276), 서정희(다-575), 김대봉(미신청), 이봉훈(미신청), 이태우(다-7822), 이병희(다-251), 이금현(다-3429), 장기연(다-6827), 장석용(미신청), 장기철(미신청), 박중원(다-2315), 박상하(다-2315), 김순동(다-245), 정씨(다-576), 안종건(다-576), 안복례(다-576), 채기동(다-899) 등 76명이다.

4.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지역주민들로서, 이 중에는 북한 점령기 인민위원회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도 일부 있으나,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혐의자 가족과 이와 무관한 지역주민이었다. 희생자 중에는 10대가 8명, 여성이 7명 포함되어 있었으며, 고양시 중면과 송포면의 주민들이 주로 희생되었다.

5. 본 사건의 가해책임은 고양경찰서(서장 이무영)에 있고, 고양경찰서의 지휘를 받으며 보조역할을 수행한 치안대․태극단에도 간접책임이 있다.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은 희생자들의 연행․구금․이송 및 총살을 감독․집행하였다. 치안대는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대동청년단․태극단원을 구성원으로 하여 결성된 경찰의 치안보조 조직으로서 고양경찰서의 지휘 아래 있었다. 특히 태극단은 고양경찰서 직할파출소에 본부를 두고 부역혐의자 연행, 고양경찰서 유치시설의 감시, 희생자들의 금정굴 처형장소 이송 등을 실행하였다. 본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의 일차적인 지휘․명령계통은 고양경찰서 → 경기도 경찰국 → 내무부 치안국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한편으로 전시 계엄령 하에서 경인지구 계엄사령부가 모든 상황을 통제․감독하고 있었다. 본 사건에서 이들 상급기관의 사건 인지, 묵인 및 지시 여부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경찰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최종 책임은 국가에 귀속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6. 고양경찰서 경찰이 희생자들을 집단 처형하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확인․선별 절차나 적법절차도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국회는 「부역행위특별처리법」․ 「사형금지법」을 제정하고 있는 중이었고, 정부는 국가기관의 불법적인 부역자 처리를 금지하는 지시를 여러 차례 발표하였음에도 경찰은 이를 준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양경찰서는 본 사건 관련 희생자들을 처형장소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재판을 받으러 간다고 속이는 위법행위를 저질렀다. 특히 수복 직후 부역자 처리를 전담하기 위해 중앙에 설치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1950년 11월 2일 본 사건 관련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 및 치안대원들을 체포한 직후 금정굴에서 처형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이승만 정부는 본 사건의 진행 중에 이미 그 위법성을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7. 본 사건은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을 불법으로 집단 총살한 사건이었다. 비록 사건 관련 희생자들 가운데 일부가 부역자 혹은 부역혐의자였다고 할지라도 적법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 총살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사건 이후에도 일부 희생자 가족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생계의 터전인 재산을 빼앗기기도 했다. 또한 연좌제에 따라 취업의 권리가 제한되고,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8. 진실화해위원회는 호적 정정조치를 비롯하여 고양 금정굴사건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사과, 임시 보관 중인 유해 영구봉안, 평화공원 설립과 위령시설 설치, 전시하 국민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 등 관련 법률 정비, 잘못된 기록의 수정 및 진실의 역사반영, 역사관 건립을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