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예천 산성동 미군폭격 사건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198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예천 산성동 미군폭격 사건.pdf [39127472 byte]
 

1. 안인모 외 50명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월 19일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 일대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실종자 및 남은 가족이 타지로 이동하여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 수는 이를 상회할 것이다.

2. 본 사건(다-3502)의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안영순, 안남숙, 권순해, 안형모, 김정수, 이재희, 안봉학, 조필순, 안자호, 김전분, 오옥난, 김금생, 안영희, 안경자, 안도희, 안병훈, 안옥늠, 손월동, 노석현, 김녹동, 안분여, 권노미, 안일녀, 안익기, 황목현, 김두실, 안희수, 안영명, 윤점순, 김심이, 안성모, 안희종, 안명모, 안인모, 안두기, 안희철, 안대기, 안병기, 안분련, 안옥하, 안귀자, 김필분, 안선기, 황분연, 안상기, 안갑여, 안갑연, 안경숙, 김지내, 이용숙, 정천봉 등으로 최소한 51명이며, 실종자 및 남은 가족이 타지로 이동하여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 수는 이를 상회할 것이다.

3.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경상북도 예천군 산성동 주민이었다. 그 중 남자는 18명, 여자는 33명이었고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16명(23%)이었다. 낮 시간에 폭격이 있었기 때문에 집 안이나 마을에 머물러 있던 여성과 어린이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4. 이 사건은 넓게 보면 미10군단장 아몬드(Edward. M. Almond)가 주장하고,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가 동의한 다음, 미5공군이 공군력으로 지원한 지역폭격 전략의 일환으로 발생했다. 지역폭격 전략이란 일정지역을 목표로 설정하여 적이 은신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까지 포함하여 집중적으로 폭격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전략에 의해 1951년 1월 18일 미 10군단 사령부는 학가산 정상(882고지)에서 반경 5마일 내의 지역에 대한 폭격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187공수연대가 산성동을 비롯한 예천 일대에 폭격을 요청하였고, 전술항공통제센터(Tactical Air Control Center : TACC)와 전술항공통제반(TACP)이 폭격지시와 통제를 담당한 상태에서 제5공군 소속의 6147 전술통제비행편대의 모스키토(정찰기)와 전폭기를 동원하여 폭격이 실행되었다.

폭격 당일 오전에 1~2대의 정찰기가 학가산과 마을을 정찰한 것으로 보이며, 그 뒤 이 날 14시 50분에 1차 폭격, 15시 40분에 2차 폭격, 15분 뒤인 15시 55분에 3차 폭격이 실행되었다. 전폭기들은 네이팜탄, 로켓트포, 기총공격으로 폭격하였는데 주로 산악 지대를 불태우는 데 사용되던 네이팜탄이 많이 사용되었다.

5. 당시 산성동 마을은 적의 이동경로로도 적합하지 않은 산골마을이었고 군사적으로 이용가치도 없었다. 또한, 주민들은 미군이나 한국군 측으로부터 사전 소개명령을 받은 적도 없었다. 따라서 이런 무방비 마을의 민간인에 대한 군사적 필요와 비례하지 않는 미군의 직접적 공격은 관련 전쟁규범의 위반행위로 전쟁범죄에 해당될 수 있으며, 위반 당사국에게는 국가책임이 발생한다.

6.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실이 규명됨에 따라 미국과의 협상을 추진하고 피해에 대해 실질적으로 보상할 수 있는 방안, 위령사업의 지원, 호적 정정을 비롯한 명예회복 조치 등을 적극 강구할 것을 권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