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고양 부역혐의희생 사건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231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고양 부역혐의희생 사건.pdf [37473645 byte]
 

1. 이범인 외 6명을 포함한 200여 명의 송포면 구산리 주민들, 안종덕 등 송포면 덕이리 주민들, 박상진 외 10명을 포함한 20여 명의 성석리 주민들, 황뇌성 외 5명을 포함한 20여 명의 현천․화전리 주민들이,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경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의 지휘․감독을 받는 치안대에 의해 송포면 구산리 한강변, 송포면 덕이리 새벽구덩이, 벽제면 성석리 귀일안골 뒷골 방공호, 신도면 현천리 공동묘지와 화전리 뒷산계곡에서 집단희생 당하였다. 또한, 지도면 대장리 허찬, 중면 일산리 서병숙, 신도면 삼송리 원정기 등이 부역혐의로 군․경에 끌려간 후 실종되었다.

2. 국군의 고양․파주지역 수복 이후 1950년 10월 초부터 고양경찰서의 지휘․감독을 받던 치안대는 지역 주민 중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한 혐의가 있는 사람과 그 가족을 연행하였다. 치안대는 송포면 구산리 인근 주민들을 가좌리 양곡창고 등에, 송포면 덕이리 주민들을 치안대 사무실에, 벽제면 성석리 주민들을 옛 성석국민학교 교실에, 신도면 현천리 주민들을 현천리 건너말창고에, 신도면 화전리 주민들을 치안대 사무실에 각각 구금하였다. 그 후 10월 중순과 하순경 구산리 주민들을 이산포나루터 등 한강변에서, 덕이리 주민들을 새벽구덩이에서, 성석리 주민들을 귀일안골 뒷골계곡에서, 현천리 주민들을 다락고개와 공동묘지에서, 화전리 주민들을 뒷산 계곡에서 집단사살하였다.

3. 본 사건에 의한 희생자는 모두 240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들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이범인(李範仁), 피원기(皮元基), 피원순(皮元順, 이상 다-6283), 김영연(金令連), 피경애(皮璟愛), 피순성(皮順成), 양용한(이상 미신청), 안종덕(安鍾德), 안종옥(安鍾玉, 이상 다-246), 박상진(朴相振), 현아순(玄阿順), 박성인(朴聖仁, 이상 다-6405), 김현세(金顯世), 차제순(車祭順), 김태규(金泰奎), 김봉규(金鳳奎), 이해용(李海龍), 김용배, 김현남, 안일례(이상 미신청), 황을성(黃乙聲), 황뇌성(黃雷聲, 이상 다-917), 황재덕, 황온순, 정범성(이상 미신청), 지희덕((池喜德, 다-6066) 등 26명이다.

4.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이었다. 이 중 피순성, 박상진, 김용배, 황뇌성, 황재덕은 인공치하에서 인민위원회 간부를 역임한 사실은 있지만 ‘부역행위자처리법’에 의해 정식재판을 받았다면 중형에 이를 정도의 부역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외에도 부역혐의자의 가족이거나 부역혐의자들과 알고 있는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된 주민들도 상당수 있었다.

5. 본 사건의 직접적 가해자는 이○○ 등 구산리 치안대, 정○○ 등 덕이리 치안대, 홍○○(洪○○) 등 벽제면 치안대, 정○○ 등 현천리 치안대, 최○○ 등 덕은리 치안대였다. 이들은 사건 전부터 불법살해의 고의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희생자들을 연행하여 살해하였고, 살해 후에도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썼다.

6. 당시 누가 명령을 해서 치안대가 이 주민들을 처형하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지휘계통에 따르면, 고양경찰서장이 각 마을의 치안대를 지휘․감독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최종 가해책임은 고양경찰서장 등 국가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더구나 이승만 정부는 부역혐의자들에 대한 불법처형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7. 유족들은 사건 후에도 살해 위협을 당했으며, 가족 해체의 고통을 겪기도 했고, 재산을 빼앗긴 채 거주하던 마을을 떠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