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작성자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31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pdf [3891578 byte]
1.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 10일 인천광역시 월미도 마을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집단희생되었다. 폭격은 리차드 루블(Richard W. Ruble) 제독의 해병대항공단 제15항모전단 항공기들에 의해 월미도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병항공기들(VMF-214, 323)은 95개(tank)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하였다. 이 집중폭격으로 동쪽지역의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2. 본 사건의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정용구(鄭龍九) 등 10명이다. 실종자 및 남은 가족이 타지로 이동하여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00여 명까지로 추산된다.
3.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월미도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 하에서 발생했다. 당시 유엔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했고 월미도는 인민군이 주둔했던 인천의 관문으로서 반드시 무력화시켜야 할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4. 당시 미군은 월미도 동쪽에 민간인 밀집 주거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미군은 상륙작전에서 인민군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자국 군인에게 큰 피해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모든 불확실성을 없애려는 작전 개념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또한 9월 13~14일 함포사격작전의 사전작업으로 인민군의 방어시설을 숨겨주는 은폐물을 없애려는 것이 폭격의 주요 목표였다. 따라서 미군은 다수 민간인 거주지를 포함한 월미도 동쪽 전체를 집중폭격했다.
5. 미군의 월미도 폭격에 대한 군사적 필요를 인정하고 적을 기만해야 할 군사적 필요가 컸다고 하더라도, 폭격 이전 폭격지점 선정에서나 폭격 중 식별할 수 있었던 민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월미도 폭격의 경우 그러한 노력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폭격하고 육안으로 식별가능한 고도에서 주민에게 기총소사까지 한 것은 국제인도법, 전쟁법의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민간인 구별의 원칙,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 작전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6. 월미도 주민들은 거주지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를 가름하는 핵심지역이 되면서 민간인 면제규범에 따른 보호도 받지 못하고 전쟁의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월미도는 군사기지가 되었고, 그에 따라 유족과 거주민은 5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여 큰 고통을 겪고 있다.
7. 진실화해위원회는 본 사건의 진실이 규명됨에 따라 한국정부에 미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본 사건의 피해에 대해 실질적으로 보상할 수 있는 방안과 함께 월미도 원주민들의 귀향 및 위령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비롯한 명예회복조치 등을 적극 강구할 것을 권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