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강화(강화도ㆍ석모도ㆍ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223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pdf [3000252 byte]
1.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윤기항(尹基恒ㆍ다-27) 등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39명을 포함한 430여 명 이상의 강화(강화도ㆍ석모도ㆍ주문도)지역 민간인들이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 점령 시기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1년 1ㆍ4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특공대 본거지인 강화경찰서와 면 지서 등으로 연행ㆍ구금되어 고문을 당한 뒤 갑곶나루, 옥림리갯벌, 월곶포구, 돌모루포구, 철산포구, 온수리 사슬재, 선원 대문고개, 매음리 어류정(개학뿌리) 등지로 끌려가 집단학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민간인 집단학살은 강화군의 12개면에서 조직적으로 벌어졌는데, 이는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 점령 시기의 부역자는 물론, 부역혐의자와 그들의 가족이 북한 재점령 시 북한에 협력할 것이라고 예단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 본 사건 희생자의 특징을 살펴보면, 신원이 확인된 139명 중 부역혐의자 가족이 83명으로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피신귀향자가 9명으로 6.4%, 부역혐의로 이미 사법상 처벌을 받은 특사령 출소자도 8명으로 전체의 5.8%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여성이 42명으로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10대 미만도 14명으로 전체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삼산면(석모도) 매음리 어류정(개학뿌리) 희생 사건의 경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17가족 53명이 살해되었다.
3. 신청사건 중에서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김덕임(金德任ㆍ다-225)등 47명이다. 신청하지 않았으나 강화 사건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안용호(安用浩) 등 92명이다.
4. 강화(강화도ㆍ석모도ㆍ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의 가해주체는 ‘강화향토방위특공대’(대장 최○○)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경기도경찰국장 한경록의 부역자 처리와 관련된 지침에 따라 1951년 1ㆍ4후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화경찰서장 김병구와 청년방위군 강화지대장 송정헌으로부터 가해 관련 지시와 함께 무기를 지원받았고, 그들의 묵인ㆍ방조 하에 민간인을 살상하였다. 또한 강화특공대는 1951년 1ㆍ4 후퇴 이후에는 서해안지역에서 첩보전 등 비정규전을 수행하고 있던 한국군과 미군으로부터 무기 등을 지원받고 그들의 묵인ㆍ방조 하에 민간인을 살상하였다. 당시 서해안지역에서는 적정(敵情) 및 각종 전술정보 수집, 피난민 심문 등에 이르기까지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한국군과 미군의 정보ㆍ첩보부대가 경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강화특공대 등 우익치안대에 무기와 식량, 군복 등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서해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군은 물론 미8군도 강화특공대에 의해 자행되고 있던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해 인지했으면서도 묵인 또는 방조했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한국군과 미군이 강화 민간인 집단학살에 직접 관여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5. ‘강화향토방위특공대’의 민간인 살해행위는 전시에 군경이 후퇴한 치안공백 상태에서 향토방위를 목적으로 행해졌다 하더라도 명백한 위법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바뀌는 상황이라고 하여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게 무기 등을 제공함으로써 준군사조직으로서의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민간인 살해를 지시하거나 묵인ㆍ방조한 군ㆍ경의 행위는 사형금지법(私刑禁止法)과 국방경비법(國防警備法) 등에 어긋나며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한 행위이다.
6.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직접적인 지휘책임은 관할 경찰과 군에 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전시 사회혼란기에 군경과 강화향토방위특공대의 폭력행사를 통제ㆍ감독하지 못한 국가에 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