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구례지역 여순 사건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151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구례지역 여순 사건.pdf [4073413 byte]
1. 박덕서(朴德緖, 직다-629) 외 164명은 여순 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구례읍, 산동면, 간전면, 광의면, 토지면, 문척면, 용방면 등 구례군 일대에서 국군 제3연대(1․2대대)와 제12연대(1․2․3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구례경찰서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당하였다. 
2. 국군 제3연대(1․2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지리산 일대의 반군토벌을 위해 산동면 원촌국민학교 등지에 주둔하면서, 구례군 일대의 민간인들을 반군 및 좌익협조혐의로 산동면 원촌국민학교와 누에고치 판매소․광의면 청년회관 등으로 연행하여 고문, 취조한 후, 산동면 시상리 꽃쟁이재․외산리 한천마을 가장골․이평리 윤씨 선산 횟골, 광의면 대산리 유산부락 새미골 등지에서 집단사살하였다.
3. 국군 제12연대(1․2․3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초까지 지리산 일대의 반군토벌을 위해 구례중앙국민학교와 구례구역 등지에 주둔하면서, 구례군 일대의 민간인들을 반군과 좌익에 대한 협조혐의로 구례중앙국민학교․구례구역․간전면 간문국민학교 등으로 연행하여 고문, 취조한 후, 구례경찰서 옆 공터, 구례읍 봉성산, 섬진강 양정지구, 서시천변(서시교 아래), 간전면 간문천변, 토지면 용두리 야산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사살하였다.
4. 한편, 구례경찰서 경찰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사찰계가 중심이 되어 구례군 일대에서 반군과 좌익에 대한 협조혐의로 민간인을 구례경찰서와 각 지서로 연행하여 구금하였다. 구례경찰서 사찰계는 연행된 민간인을 고문․취조한 후, 사살대상자를 정하여 구례경찰서 옆 공터, 구례읍 봉성산, 섬진강 양정지구, 서시천변(서시교 아래) 등지에서 사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례지역 대한청년단원들이 동원되어, 군경의 민간인 학살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5. 1948년 10월 말에서 1949년까지 구례지역 여순 사건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수는 약 800명 정도로 추정되지만, 진실화해위원회가 희생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희생자는 165명이며, 그 외 이 사건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9명이다.
6. 본 사건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165명 가운데 20대와 30대가 118명으로 71.6%를 차지하였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5.8%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가장 활동적인 시기의 청년 남성이 민간인 희생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면별 분포에서는 총 9개면 가운데 간전면과 산동면에서 55.2%에 해당하는 91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7. 군경 참고인 가운데 일부는 희생자들이 반란에 가담하거나 협력한 ‘남로당원’, ‘지방폭도’, ‘빨갱이’였다고 주장하며, 가해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본 사건 당시 반군 활동 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반군에게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이유는 대체로 반군과의 관련성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반군협조혐의로서, 숙식이나 식량제공․노무동원․반군과의 연락이나 반군은닉 등이 대표적이었다. 여기에는 반군이 활동한 작전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도 포함된다. 둘째는 남로당 등 좌익단체에 가입한 혐의로 희생당한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 좌익혐의로 지목되었다는 추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가입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경의 가해는 자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셋째는 본 사건 자체와 무관한 대살(代殺)로, 좌익 및 입산자 가족 또는 동료라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이다. 이 밖에도 연행이유와 피해이유를 모르거나, 무고와 모략, 고문으로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군경이 민간인을 자의적이며 무리하게 연행 및 취조하고 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8. 본 사건의 가해주체는 국군 제3연대(1․2대대)와 국군 제12연대(1․2․3대대) 그리고 구례경찰서 경찰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3연대의 지휘․명령계통은 호남방면전투사령관 원용덕(제2여단장) → 북지구전투사령관 원용덕(겸임) → 제3연대장 함○○ → 제1대대장 박○○․제2대대장 조○○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12연대의 지휘․명령계통은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 남지구전투사령관 김백일(제5여단장) → 제12연대장 백○○․백○○․송○○ → 1대대장 허○․2대대장 김○○․3대대장 이○○․연○○ 등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지휘․명령계통은 1948년 11월 30일 호남방면전투사령부 해체 이후 제2여단장 원용덕․제5여단장 김백일 → 제3연대장 함○○․제12연대장 송○○로 각각 개편되었다. 1949년 3월 1일 이후에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정일권)가 구례지역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결국 본 사건은 현지 토벌작전 지휘관의 명령 아래 발생했지만, 최종적인 감독책임은 국방부,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구례지역 경찰은 이중의 지휘․명령계통 하에서 활동했다. 하나는 구례지역 계엄사령관 → 구례경찰서장, 다른 하나는 제8관구경찰청(전남경찰국) → 구례경찰서장으로 하달되는 계통이었다. 본 사건 당시 구례경찰서장은 장 ○○․봉○○․배○○이었다. 그리고 당시 제8관구경찰청장(전남경찰국장)은 김병완․김상봉이었다. 경찰 최상급 기관인 내무부 치안국이 본 사건과 관련하여 직접 명령을 내렸거나 보고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지휘 및 관리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9. 본 사건 과정에서 군경당국은 본 사건 관련자를 체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연행, 불법적인 취조와 고문, 자의적인 심사와 분류에 따른 살해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본 사건에서 군경이 작전과정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근거는 계엄령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본 사건 당시 계엄령은 계엄법이 부재한 상황에서 공포되었고, 비록 계엄사령관에게 행정권과 사법권은 주어졌으나,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은 없었다. 본 사건 당시 현지 지역사령관은 계엄령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 아래, 민간인을 반군협력자라는 혐의만으로 불법적으로 연행하여 살해하였는데, 이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계엄령의 일반적 한계를 벗어난 위법적인 행위였다.
계엄령 아래에서 이루어진 군의 ‘즉결처분권’은 민간인 살해나 처형을 정당화하는 주요한 근거였으나, 법의 일반적 요건이나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계엄포고문에서 ‘즉결처분’은 “군율”에 따르도록 규정하였으나, 민간인을 ‘즉결처분’, 곧 임의처형하는 과정에서 관련 법조항을 따르지 않았다. 본 사건에서 군경당국은 법적 통제를 받지 않고 작전의 편의성이나 효율성만을 고려하여 ‘즉결처분’을 남용하였다. 이에 많은 민간인들은 반군에 협조한 혐의만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당하였으며, 이는 ‘즉결처분’이 사실상 학살이었음을 말해준다.
10.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구례지역 여순 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지원조치를 마련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유사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 본 사건의 진실규명 내용을 관련 역사기록에 반영하고, 평화인권교육을 강화할 것을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