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대구ㆍ경북(Ⅰ-1) 국민보도연맹 사건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09-12-03
조회수
124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5권_대구 경북(I-1) 국민보도연맹 사건.pdf [5372932 byte]

 1. 예천군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한국전쟁 당시 경상북도 경찰국, 예천경찰서 소속 경찰(또는 군인)에 의해 1950년 7월 13일과 14일, 그리고 16일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현 예천읍) 고평리 고평나들, 개포면 경진리 경진나들(서울나들), 용궁면 산택리 원당고개(벼락고개) 등에서 집단살해되었다.

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앙의 지시를 받은 예천경찰서가 각 지서에 국민보도연맹 예천군연맹에 가입되었던 보도연맹원들과 과거 좌익활동 등의 혐의로 관리 대상이었던 예비검속자들의 연행 및 소집통보를 하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예천경찰서 및 각 지서 소속 경찰․특공대 등에 의해 연행되거나 소집통보를 받고 자진출두하였다가 각 지서를 경유(일부 지서에서 구금)하여 예천경찰서 유치장, 무도장(연무장) 등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과거 좌익활동 경력 등의 정도에 따라 등급이 분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부분 2∼3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예천경찰서가 후퇴하기 직전인 1950년 7월 중순경 경북 예천군 관내 주요 장소에서 집단살해되었다.

나. 조사 결과, 예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는 황영수(黃永壽, 다-2799호) 등 59명이다.

다. 예천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59명의 신원을 살펴보면, 성별로는 남자가 대다수(58명, 98.3%)였고, 연령별로는 20대가 32명(54.2%), 30대가 17명(28.8%)으로 전체 희생자 중 청․장년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83.0%였으며, 직업별로는 농업이 40명(67.8%)으로 대부분의 희생자가 당시 농사를 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예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는 대부분 자신의 거주지에서 농사를 짓던 20∼30대 청․장년층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 문경군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한국전쟁 당시 문경경찰서 소속 경찰(또는 군인)에 의해 1950년 7월 10일경, 7월 14일경, 그리고 7월 16일경 경상북도 문경군 농암면 뭉우리재, 호서남면 유곡리, 영순면 김용리 또는 의곡리 등에서 집단살해되었다.

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앙의 지시를 받은 문경경찰서가 각 지서에 국민보도연맹 문경군연맹에 가입되었던 보도연맹원들과 과거 좌익활동 등의 혐의로 관리 대상이었던 예비검속자들의 연행 및 소집통보를 하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문경경찰서 및 각 지서 소속 경찰 등에 의해 연행되거나 소집통보를 받고 자진출두하였다가 각 지서를 경유(일부 지서에서 구금)하여 문경경찰서 등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1∼2일 또는 2∼3일 정도(최장 7일)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초중순경 경북 문경군 관내 주요 장소에서 집단살해되었다.

나. 조사 결과, 문경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는 류덕우(柳德佑, 다-172호) 등 38명이다.

다. 문경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38명의 신원을 살펴보면, 성별로는 남자가 대다수(37명, 97.4%)였고, 연령별로는 20대가 18명(47.4%), 30대가 16명(42.1%)으로 전체 희생자 중 청․장년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89.5%였으며, 직업별로는 농업이 23명(60.5%)으로 대부분의 희생자가 당시 농사를 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문경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는 대부분 자신의 거주지에서 농사를 짓던 20∼30대 청․장년층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3. 상주군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한국전쟁 당시 상주경찰서 소속 경찰(또는 군인)에 의해 1950년 7월 중하순경 경상북도 상주군 낙동면 구잠리 소재 속칭 ‘부치데이’ 고개, 성골 등에서 집단살해되었다.

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앙의 지시를 받은 상주경찰서가 각 지서에 국민보도연맹 상주군연맹에 가입되었던 보도연맹원들과 과거 좌익활동 등의 혐의로 관리 대상이었던 예비검속자들의 연행 및 소집통보를 하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상주경찰서 및 각 지서 소속 경찰 등에 의해 연행되거나 소집통보를 받고 자진출두하였다가 각 지서를 경유(일부 지서에서 구금)하여 상주경찰서 및 현 함창중고등학교 부지 창고 등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2∼3일 또는 5∼6일 정도(최장 10일)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중하순경 경북 상주군 관내 주요 장소에서 집단살해되었다.

나. 조사 결과, 상주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는 송병조(宋炳祖 또는 宋炳祚, 다-427호) 등 23명이다.

다. 상주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23명의 신원을 살펴보면, 성별로는 23명 모두 남자였고, 연령별로는 20대가 15명(65.2%), 30대가 7명(30.4%)으로 전체 희생자 중 청․장년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95.7%였으며, 직업별로는 농업이 17명(73.9%)으로 대부분의 희생자가 당시 농사를 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상주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는 대부분 자신의 거주지에서 농사를 짓던 20∼30대 청․장년층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4. 영주군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한국전쟁 당시 영주경찰서 소속 경찰(또는 군인)에 의해 1950년 7월 중순경 또는 8월 중순경 경상북도 영주군 영주읍 상망리 등에서 집단살해되었다.

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앙의 지시를 받은 영주경찰서가 각 지서에 국민보도연맹 영주군연맹에 가입되었던 보도연맹원들과 과거 좌익활동 등의 혐의로 관리 대상이었던 예비검속자들의 연행 및 소집통보를 하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영주경찰서 및 각 지서 소속 경찰 등에 의해 연행되거나 소집통보를 받고 자진출두하였다가 각 지서를 경유하여 영주경찰서 등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하루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초순경 또는 8월 중순경 경북 영주군 관내 주요 장소에서 집단살해되었다.

나. 조사 결과, 영주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는 송학순(宋學淳, 다-5107호) 등 2명이고, 신원을 살펴보면 모두 남자에 연령으로는 30대와 40대였으며, 직업으로는 구장과 농업이었다.


5. 이상과 같은 대구․경북(Ⅰ-1)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기관은 지역별로 예천․문경․상주․영주경찰서 소속 경찰, 군인 등으로 추정되었으나, 이 이상의 구체적인 가해기관의 소속이나 규모, 인원 등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6. 상부로부터 대구․경북(Ⅰ-1)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살해명령 여부 및 내용을 자료로써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전시계엄하에서 희생자들의 불법살해에 대한 지휘․명령권한은 상부로부터 위임된 것이므로 민간인희생의 최종적 책임은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7. 대구․경북(Ⅰ-1)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경찰 또는 군인이 관할지역의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을 불법 살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대규모의 민간인들이 아무런 적법한 절차 없이 예비검속되어 살해당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