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국민보도연맹 사건(직권)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09-12-04
조회수
120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7권_ 국민보도연맹 사건.pdf [16001137 byte]

1.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와 경찰, 헌병,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소집․연행․구금된 후 집단학살되었다.


2.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요시찰인으로 감시하던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연행․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하였다. 이는 정부가 보도연맹원 등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사람들을 예비구금하여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3. 국민보도연맹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다.

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에 대한 경찰의 예비검속은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강원 북부지역에서는 예비검속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강이남 전국 각 지역에서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인근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나. 일부지역에서 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구금된 예비검속자들의 과거 활동을 심사하였다.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았고, 활동정도에 따라 ‘A․B․C(D)’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는 폭력과 고문이 수반되었고, 구금기간이 길었던 영남 남동부 인민군 미점령지역에서는 심사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이 연행된 후 심사․분류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살해 되었다.

다. 구금된 보도연맹원 중 ‘A(갑)’로 분류된 주요간부들은 대부분 7월 초순경에,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은 인민군이 점령하기 직전 즉, 군․경이 후퇴하기 직전에 살해되었다. 예비검속자 중 일부는 경찰의 묵인 하에 도망치거나 사적 연고, 금품 제공 등을 통해 풀려나기도 했고, 일부지역에서는 경찰이 직접 그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4. 보도연맹 결성을 관장했던 검․경 주요 간부들은 국민보도연맹원 규모는 약 30만 명에 달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조사결과 희생자 수 추산이 가능한 몇 개 군의 경우, 보도연맹원 중 약 30~70%가 학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 발발 후 수복 직전까지 국민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요시찰인 전체 희생규모는 알 수 없으나, 각 군 단위에서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1,000여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5. 이 사건의 가해기관과 책임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소집․연행․학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공군정보처(G-2)․해군정보참모실(G-2)․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 중 수사정보기관인 경찰 사찰계와 CIC가 실질적으로 이 모든 과정을 관장하였다.

나. 국민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예비검속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비검속과 사살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당시 군․경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하여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최고위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실행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사건 가해자는 국가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보도연맹 조직결성 및 이후 학살에 이르는 전 과정의 행정부 수반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사건에 대해 역사적 책임은 물론 실질적 책임이 있다. 


6. 국민보도연맹원 학살배경과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국민보도연맹은 정부에 의해 결성․운영되는 관변단체였으며, 가맹 대상자들은 자발적 의사보다는 대부분 정부의 강제적․폭력적 행정집행 절차를 거쳐 가입되었다. 애초 좌익경력자가 국민보도연맹의 주요 가입대상이었으나 그 규정이 광범위하고 자의적이어서 좌익관련자들 뿐만 아니라,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는 물론 무고한 국민들도 상당수 가입되었다.

나. 정부는 보도연맹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완전히 전향했다고 판단되면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공표하였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요시찰대상으로 취급하였다. 특히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으로 감시대상이 된 사람들은 이승만 정권의 극우 반공주의 하에서 정치․사회적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한 공공연한 폭력행사도 빈발하였다.

다. 북한의 남침으로 혼란상태에 빠진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이 수도권 일부지역에서 인민군을 환영하는 행동을 보인 예가 있고 또 나머지 지역의 요시찰인들이 장차 북한에 동조하여 정부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이들을 곧바로 연행․구금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정부는 후퇴하기 전 이들을 학살하였다.


7. 비록 당시가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와 비상사태였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국민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형’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근거와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경찰과 CIC, 헌병, 우익단체 등은 임의적으로 예비검속한 구금자들을 집단학살 하였다.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었다.


8.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이후 198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까지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하여 감시하였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하여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하였다. 따라서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일부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차별을 받아왔으며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