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구미김천상주영덕포항지역 민간인희생 사건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10-06-14
조회수
108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4권-7-구미 김천 상주 영덕 포항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pdf [2019598 byte]

1. 전주헌 외 63명의 구미ㆍ김천ㆍ상주ㆍ영덕ㆍ포항지역 주민들이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 인민군 측에 협력할 것이라는 이유, 인민군 측에 협력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작전지역 또는 관할지역의 국군과 경찰에 의해 구미 고아면 반티모리, 김천 구성면 꿀재, 상주 은척면 소갯골 골짜기, 영덕 남산리 방천둑, 포항 장기천변 등에서 집단희생되었다.

2. 구미에서는 선산면 원2리 이병모는 국민보도연맹원이었다는 이유로 1950년 7월경 선산경찰서에 의해 고아면 봉한리 반티모리에서 총살당했다. 도개면 신곡리 김헌직은 국민보도연맹원의 가족으로서 국군 수복 후 1950년 9월 말경 국군에게 연행되어 해평면 낙산리 칠창강변에서 총살당했다. 도개면 신림리 전길상은 1947년 8월 5일 7~8명의 마을청년들과 함께 모임을 하던 중 이들을 체포하려는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였으나 이 행위의 위법성을 밝힐 수 없어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되었다.

3. 김천에서는 감천면 광기리 한상호가 1950년 7월경 국민보도연맹원으로 김천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구성면 지례골짜기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다수동 전주헌은 국민보도연맹원의 가족으로서 1951년 2월 6일 경찰에 의해 연행된 후 불상의 장소에서 희생되었다. 구성면 광명리의 여환직 등 6명은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를 받아 인근 야산에서 피신생활을 하던 중 1951년 2월 10일경 부항면 파천리 뒷산에서 김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에게 체포되었다가 2월 14일 밤 한때 은신처였던 구성면 꿀재로 끌려와 총살 등으로 희생되었다.

4. 상주에서는 은척면 봉중리 안영기 등 5명이 1950년 7월 31일 후퇴하던 수도사단 제18연대 국군에 의해 연행된 후 은척면 하홀리 소갯골 골짜기에서 총살되었다. 공성면 산현리의 백봉원 등 14명은 1950년 9월 25일 밤과 26일 새벽 북진 중 마을에 주둔하게 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에 의해 인민군 측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마을 재실에 갇혀 고문을 당한 후 재실 앞 냇가에서 총살당했다. 청리면 가천리 김형문, 김형우, 김철원, 이태하는 1950년 9월 26일 마을에 주둔한 국군 제12연대에 의해 부역혐의로 마을회관에 감금되었다가 김철원, 이태하는 마을입구 하천변에서 총살당했으며, 김형문, 김형우는 공성면 옥산리 산제비골짜기로 추정되는 곳에서 총살당했다.

5. 영덕에서는 영덕면 대탄리 백운경이 빨치산에 의해 입산된 후 1949년 6월 20일경 안동경찰서에 체포된 후 인근 야산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영해면 묘곡리 주후원은 빨치산에게 쌀을 운반했다는 이유로 영해지서에 연행된 후 1949년 11월 5일 영해국민학교 뒷산 계곡에서 성명불상의 주민 7명과 함께 총살당했다. 영해면 원구리 권상술은 1949년 경찰에 체포된 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가 1950년 7월 8일 같은 마을 권성달과 함께 후퇴하던 영덕경찰서 경찰에 의해 울진 평해면 어팃재에서 총살당했다. 지품면 삼화리 권만돌은 1949년 6월 25일 마을반장으로서 산에서 전봇대를 지키는 보초활동을 마치고 내려오던 중 마을에서 수색활동을 하던 국군에게 잡혀 마을 입구에서 총살당했다. 지품면 황장리 김태흥은 1949년 7월 13일 빨치산에 식량을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원전지서로 연행된 후 경찰에 의해 원전리 각별계곡에서 총살당했다. 창수면 백청리 박우동은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창수지서에 체포된 후 1949년 8월 3일 창수지서 뒤 반송지 강변에서 신원불상의 주민 1명과 함께 총살당했다. 축산면 대곡리의 오중학 등 4명은 1947년 3월 6일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축산지서 소속 경찰에게 연행되어 대곡리 초막골 냇가에서 총살당했다. 축산면 대곡리의 오태유 등 3명은 1948년 8월 30일 마을 인근 빈집에서 피신하던 중 당시 토벌작전 중이던 국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축산면 대곡리의 신병진 등 4명은 1949년 4월 12일 토벌작전 중인 국군에게 연행되어 영덕경찰서에 감금되었다가 남산리 방천둑에서 총살당했다. 축산면 칠성리 남준희, 남규희는 1949년 4월 18일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축산면사무소 뒷산 계곡에서 총살당했다.

6. 포항에서는 환호동 장만수가 함포사격을 피해 숨어 있던 중 1950년 8월 20일경 후퇴하던 국군에게 발각되어 피난하던 집 앞에서 총살당했으며, 송라면 대전리 이형우, 임명암은 1949년 12월 28일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송라지서로 연행되어 인근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송라면 지경리 박순이는 장사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9월 15일 마을주민 20여 명과 함께 함포사격을 피해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뒷산으로 피난하던 중 이 지역을 수색하던 국군 3명에게 총살당했다. 죽장면 석계리 정진학은 1949년 3월 중순 2명의 마을주민과 함께 맹호부대 군인들에 의해 죽장지서로 연행되었다가 3월 23일 경주 안강읍에서 총살당했다. 청하면 서정리 이상도는 1949년 5월 중순 같은 마을 주민 김갑도와 함께 국군에 의해 연행되어 청하면 유계리 황암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구룡포읍 강사리 서병환은 우익단체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보지서로 연행되었다가 1949년 3월 14일 인근 솔백에서 총살당했다. 구룡포읍 구만리 서원석은 같은 마을 이종선 등과 함께 1948년 11월 30일 대보지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가 흥해면 뒤 솔밭에서 총살당했다. 동해면 입암리 이상진은 1949년 6월 17일경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마을 뒷산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장기면 계원리 청년회 감찰부장 노병환은 출몰한 빨치산을 제때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같은 마을 청년회장 김한용과 함께 장기지서로 연행된 후 1949년 11월 19일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에 의해 장기천변에서 총살당했다.

7. 구미지역의 신청사건 희생자는 이병모(李秉模, 다-6063) 등 2명이며, 신청사건 전길상(全吉相, 다-8933)은 진실규명불능이다.

김천지역의 신청사건 희생자는 전주헌(全周憲, 다-1906) 등 7명이며, 희생추정자는 한상호(韓相鎬, 다-8754) 1명이다.

상주지역의 신청사건 희생자는 안영기(安榮基, 다-7551) 등 17명이며, 미신청사건 희생자는 이의상(李義尙) 등 5명이다.

영덕지역의 신청사건 희생자는 김태흥(金太興, 다-3783) 등 15명이며, 희생추정자는 백운경(白雲景, 다-1784) 1명이고, 미신청사건 희생자는 권성달 등 2명이다.

포항지역의 신청사건 희생자는 이상도(李相道, 다-4005(1)) 등 11명이며, 미신청사건 희생자는 김갑도, 이종선, 김상원 등 3명이다.

8. 희생자들은 군경토벌작전 당시 작전구역 안에 거주하였던 주민들, 반정부활동 경력이 있던 주민들, 국군 수복 후 인민위원회 일을 봤던 주민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구미 등 사건 지역에서 희생자로 확인ㆍ추정된 주민들은 모두 65명이나 이는 신청된 사건을 중심으로 조사된 경우이므로,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각 지역에서 있었다는 진술과 문헌자료로 보아 전체 희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9. 이 사건의 가해주체는 ①경북지역 후방 예비 부대였던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 제23연대, 제25연대, ②후퇴 중이던 국군 수도사단 제18연대, ③북진 중이었던 국군 제1사단 12연대, ④각 지역 관할 경찰서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가해책임은 각 경찰서과 경북경찰국, 국군에 있으며 공권력의 불법행사를 막지 못했던 정부에게까지 책임이 귀속된다.

10.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에 대한 가해행위는 위법한 것이었다. 국군과 경찰은 짧은 시간 내 형식적인 조사과정을 거친 후 희생자들을 총살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인 생명권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불법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