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박창래의 여수수산학교 학생독립운동 사건

작성자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28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항일독립운동
첨부파일
박창래의 여수수산학교 학생독립운동 사건.pdf [13947002 byte]
 

1. 박창래(朴昌來, 1914년생)는 여수공립 수산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0년 학생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인 독서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로 인해 같은 해 9월 다른 독서회 관련자 21명과 함께 퇴학처분을 당하고 검거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이에 진실규명 신청인은 ‘독서회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 박창래의 독립운동 사실에 대한 확인과 명예회복을 요청하였다.


2. 여수수산학교의 독서회 조직은 1930년 3월 여수 종고산 정상에서 열린 모임에서 발족했으며, 여수지역의 청년 단체 중 항일성격을 가진 주요한 단체였다. 박창래는 백인렬의 권유를 받아 동(同)회에 가입했고, 초기에는 백인렬 조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나, ‘독서회’에 참여하는 인원이 늘어나자 5개조 중에 정학조가 대표로 선임되었던 2조에서 활동했다. 그는 김재곤 등과 같은 조에서 활동하면서 일제의 한반도 차별정책과 식민지 교육에 불만을 품고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했으며, 동료 학생들과 회합을 갖고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항일투쟁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9월 독서회 회원들의 활동이 일제에게 발각되어 박창래도 다른 관련자들과 함께 구속 수감 되었으며, 1931년 9월 4일 동료 13명과 광주지방법원으로부터 치안유지법 위반(제1조제2항)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이와 같이 박창래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독서회’ 조직을 통해 반일적 사상을 가지고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로 인정되며, 이러한 사실은 예비조사에서 행했던 문헌조사, 전문가 면담조사에서 뿐만 아니라 참고인들의 일관된 진술에서도 확인이 되었다.


3. 사회주의계열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독서회‘의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해방 전 박창래가 독서회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그가 사회주의 사상과 연계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여순사건 당시 그가 화양면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은 문헌자료와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며, 전문가들의 견해 및 참고인들과 신청인의 진술을 종합하여 고려할 때, 박창래는 여순사건 발생 후 진압군에게 체포되어 ‘만성리 형제묘’에서 군경에게 희생당했다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4. 결론적으로 1930년대 독서회 활동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은 박창래의 항일 행적은 1931년 9월 4일자 여수수산학교 독서회 판결문등을 통해 확인된 바, 본 사건은 기본법 제2제1항제1호의 규정에 의거하여 진실규명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