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제주 예비검속 사건(섯알오름)

작성자
작성일
2008-08-27
조회수
36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제주 예비검속 사건(섯알오름).pdf [70488823 byte]
 

1. 강경도(姜敬道, 사건번호 다-3351) 외 217명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6~20일경, 그리고 약 한달 후인 8월 20일(음력 7월 7일)에 제주도 남제주군 상모리 섯알오름에 위치한 일제시대 탄약고로 쓰이던 굴에서 해병대사령부 산하 모슬포부대 제○중대 ○소대 소속 부대원 및 동 사령부 산하 제○대대 소속 분대장 급 이상의 하사관들에 의해 각각 집단총살 당하였다.

2. 위 사건의 경위를 보면, 1950년 6월 25일 제주도경찰국이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금할 것을 지시하자, 모슬포경찰서는 관할 지서인 한림지서․고산지서․안덕지서․두모지서․저지지서․대정지서․무릉지서에 각각 지시를 내려 예비검속 대상 주민들을 연행하여 구금하도록 하였다. 이에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들은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한림 어업조합창고, 무릉지서 창고에 각각 구금되었다. 구금 장소인 창고 경비는 경찰, 그리고 경찰 소속 의용소방대원들이 담당하였다.

3. 모슬포경찰서는 구금한 예비검속자들의 과거 경력을 조사하고 명부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실무는 모슬포경찰서 사찰계가 담당하였다. 이들은 예비검속자들을 개인별로 심사하여 종별(種別)로 사정(査定)하고, 전체 D․C․B․A의 4등급으로 분류하였다. 이 가운데 B․A급은 석방 또는 계속 구금되었고, 나머지 D․C급은 1950년 7월 16일, 그리고 8월 20일경 두 차례에 걸쳐 해병대 당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의 보고를 보면, 전체 344명을 예비검속하여 이 가운데 D․C급 252명을 송치하였다. 이들 D․C급으로 분류되어 송치된 예비검속자 가운데 일부는 석방되었지만, 대부분 총살되었기 때문에 경찰의 등급 분류는 예비검속자 집단총살의 일차적 기준이 되었다.   

4. 해병대 당국에 송치된 예비검속자들은 두 차례에 걸쳐 집단총살 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청인․참고인 진술, 경찰 공식문서에서 확인되었다. 1차 총살은 해병대 모슬포부대(부대장 김○○)에 의해 1950년 7월 16~20일경에 집행되었다. 이 때 모슬포 해병대원들은 총살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 미리 도착, 지휘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렬종대로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트럭에 실려 온 민간인들을 한 사람씩 끌고 가서 굴 입구에 세워 놓고 총살을 집행하였다. 2차 총살은 모슬포 주둔 해병대 제○대대(대대장 김○○)에 의해 1950년 8월 20일에 집행되었다. 해병대 ○대대 대원들은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예비검속자들을 군 트럭을 이용, 1차 총살 때와 같은 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로 끌고 가서 총살을 집행하였다.

5. 조사결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모두 218명으로 확정되었다. 사건 희생자는 강경도(姜敬道, 사건번호 다-3351), 강경옥(姜京玉, 사건번호 다-10644), 강계생(姜癸生, 사건번호 다-10644), 강공율(姜公律, 사건번호 다-1461), 강기선(康箕先, 사건번호 다-6645), 강기선(姜己仙, 사건번호 다-7585), 강두훈(姜斗勳, 미신청), 강상수(姜尙修, 사건번호 다-394), 강상호(姜相鎬, 사건번호 다-7573), 강성휴(姜聖休, 사건번호 다-7981), 강승호(姜丞浩, 사건번호 다-8459), 강영보(姜永輔, 미신청), 강영수(姜永守, 사건번호 다-415), 강완호(姜完鎬, 미신청), 강원세(姜元世, 사건번호 다-10644), 강위림(姜渭林, 사건번호 다-7571), 강위영(姜渭永, 미신청), 강인경(姜仁慶, 미신청), 강인아(姜仁兒, 사건번호 다-399), 강재고(姜在高, 사건번호 다-3892), 강재윤(姜裁閏, 사건번호 다-10590), 강정여(姜丁汝, 미신청), 강진호(姜晋湖, 미신청), 강태욱(姜泰旭, 미신청), 강태호(姜泰鎬, 사건번호 다-7573), 고공오(高公五, 사건번호 다-9439), 고기남(高奇男, 사건번호 다-9325), 고기하(高琪河, 미신청), 고도호(高道好, 사건번호 다-9609), 고두천(高斗千, 미신청), 고두형(高斗衡, 사건번호 다-5202), 고상호(高相昊, 미신청), 고성권(高聖權, 미신청), 고수남(高壽南, 미신청), 고아(高亞, 미신청), 고영수(高永秀, 사건번호 다-8133), 고완봉(高完封, 사건번호 다-297), 고운경(高雲京, 사건번호 다-7577), 고원식(高元植, 사건번호-294), 고익준(高益俊, 사건번호 다-10644), 고인지(高麟智, 사건번호 다-10209), 고일봉(高日奉, 사건호 다-9253), 고일선(高日先, 미신청), 고자흡(高子洽, 사건번호 다-9440), 고태옥(高太玉, 미신청), 고태호(高泰昊, 미신청), 고행칠(高行七, 사건번호 다-10644), 김군희(金君熙, 사건번호 다-9326), 김권홍(金權鴻, 사건번호 다-1460), 김남우(金南祐, 사건번호 다-10644), 김달하(金達河, 사건번호 다-392), 김대석(金大錫, 사건번호 다-10644), 김대수(金大洙, 사건번호 다-389), 김대식(金大植, 사건번호 다-10644), 김대완(金大完, 사건번호 다-10644), 김두석(金斗錫, 사건번호 다-420), 김두인(金斗仁, 미신청), 김두일(金斗日, 사건번호 다-7519), 김병돈(金柄敦, 사건번호 다-296), 김병생(金丙生, 사건번호 다-4105), 김보경(金寶慶, 사건번호 다-10644), 김보만(金寶萬, 사건번호 다-10644), 김봉문(金封文, 사건번호 다-6783), 김봉수(金奉壽, 사건번호 다-10644), 김사천(金四千, 미신청), 김상옥(金詳玉, 미신청), 김석(金石, 사건번호 다-7326), 김순옥(金順玉, 미신청), 김승국(金承國, 사건번호 다-10644), 김승부(金昇富, 사건번호 다-388), 김시백(金時白, 미신청), 김양훈(金揚勳, 미신청), 김용준(金龍準, 미신청), 김우현(金禹鉉, 미신청), 김운학(金雲鶴, 미신청), 김원봉(金元琫, 사건번호 다-385), 김원석(金元錫, 미신청), 김응흡(金鷹洽, 사건번호 다-5201), 김희숙(金喜淑, 미신청), 김종문(金宗文, 미신청), 김창범(金昌範, 사건번호 다-3352), 김창욱(金昌旭, 사건번호 다-3353), 김태국(金太國, 미신청), 김태선(金泰善, 미신청), 김태원(金泰元, 사건번호 다-1942), 김태은(金泰銀, 사건번호 다-3354), 김태인(金太仁, 사건번호 다-396), 김태호(金太昊, 사건번호 다-7710), 김하윤(金河潤, 사건번호 다-9441), 김하종(金河鍾, 사건번호 다-3348), 김행오(金行五, 사건번호 다-10644), 김희전(金熙銓, 사건번호 다-8420), 문공찬(文孔瓚, 미신청), 문도홍(文道洪, 사건번호 다-10644), 문무겸(文武兼, 사건번호 다-10644), 문성사(文聖士, 사건번호 다-10208), 문승호(文昇好, 미신청), 문신자(文信子, 사건번호 다-10644), 문량숙(文亮淑, 미신청), 문종반(文宗般, 사건번호 다-10644), 문춘옥(文春玉, 사건번호 다-10644), 문태일(文泰一, 사건번호 다-10644), 박경선(朴景先, 사건번호 다-10644), 박능(朴能, 사건번호 다-1005), 박성언(朴性彦, 사건번호 다-2731), 박신원(朴新元, 사건번호 다-7909), 박원돌(朴元乭, 미신청), 변봉흠(邊奉欽, 사건번호 다-7950), 변재옥(邊載玉, 사건번호 다-10644), 변춘봉(邊春奉, 미신청), 변해생(邊亥生, 사건번호 다-10638), 부길권(夫吉權, 미신청), 부일관(夫日官, 미신청), 부종훈(夫悰熏, 사건번호 다-10644), 송경탁(宋璟鐸, 사건번호 다-10592), 송대길(宋大吉, 사건번호 다-3355), 송병언(宋丙彦, 사건번호 다-10644), 송영봉(宋永鳳, 미신청), 신두인(申斗印, 사건번호 다-384), 신응인(申應麟, 사건번호 다-9328), 양경만(梁庚萬, 사건번호 다-387), 양경호(梁景昊, 사건번호 다-1943), 양계출(梁桂出, 미신청), 양기하(梁基河, 사건번호 다-4987), 양덕필(梁德弼, 사건번호 다-10640), 양두석(梁斗錫, 사건번호 다-10644), 양두일(미신청), 양명만(梁明萬, 사건번호 다-3350), 양문주(梁文珠, 사건번호 다-1462), 양병헌(梁秉憲, 사건번호 다-291), 양봉하(梁鳳河, 사건번호 다-386), 양석찬(梁石贊, 미신청), 양승인(梁升仁, 사건번호 다-10210), 양시하(梁時河, 사건번호 다-6977), 양윤하(梁允河, 사건번호 다-7583), 양태숙(梁泰淑, 사건번호 다-9438), 양한병(梁漢柄, 사건번호 다-397), 오계하(吳季夏, 사건번호 다-352), 오동건(吳東乾, 사건번호 다-5012), 오용숙(吳鏞淑, 사건번호 다-391), 오원립(吳元立, 사건번호 다-10644), 오인백(吳仁佰, 미신청), 오중효(吳仲孝, 미신청), 오창용(吳昌瑢, 사건번호 다-4106), 오태석(吳泰石, 사건번호 다-442), 오태옥(吳太玉, 사건번호 다-10591), 오행선(吳行善, 사건번호 다-393), 오형남(吳荊南, 사건번호 다-7584), 오형택(吳亨澤, 사건번호 다-7711), 이기삼(李祺三, 미신청), 이동원(李東原, 사건번호 다-10644), 이만배(李晩培, 사건번호 다-5714), 이방수(李方秀, 사건번호 다-1463), 이방순(李芳順, 사건번호 다-1464), 이상봉(李上奉, 사건번호 다-10644), 이상순(李相順, 사건번호 다-7572), 이영호(李英皓, 사건번호 다-10644), 이용춘(李龍春, 사건번호 다-10644), 이윤배(李允培, 사건번호 다-4733), 이윤찬(李允燦, 사건번호 다-9038), 이자익(李子益, 사건번호 다-8716), 이재근(李在根, 사건번호 다-7578), 이재호(李在浩, 사건번호 다-10644), 이정팔(李丁八, 사건번호 다-10644), 이창우(李昌宇, 사건번호 다-295), 이창흥(李昌興, 사건번호 다-10644), 이춘부(李春富, 사건번호 다-10644), 이춘실(李春實, 사건번호 다-8134), 이태성(李泰成, 사건번호 다-10644), 이태실(李泰實, 사건번호 다-3988), 이행일(李行日, 미신청), 이현필(李賢弼, 사건번호 다-10644), 이호남(李浩南, 사건번호 다-10644), 임시춘(林始春, 사건번호 다-390), 임왈수(林曰秀, 사건번호 다-10644), 장대진(張大珍, 미신청), 장법린(張法麟, 미신청), 장성림(張成琳, 사건번호 다-7520), 장승옥(張升玉, 미신청), 장종선(張鍾善, 사건번호 다-9610), 정이환(鄭以桓, 사건번호 다-7319), 정철훈(鄭哲訓, 사건번호 다-10644), 정필주(鄭弼周, 미신청), 조경호(趙京浩, 사건번호 다-10644), 조난아(趙鸞兒, 사건번호 다-5131), 조병두(趙柄斗, 사건번호 다-3356), 조봉천(趙封千, 사건번호 다-395), 조붕아(趙鵬兒, 사건번호 다-10644), 조성수(趙性洙, 사건번호 다-299), 조신돌(趙辛乭, 사건번호 다-5057, 사건번호 다-1459), 조영삼(趙永三, 사건번호 다-1064), 조원구(趙原九, 사건번호 다-10644), 조재평(趙才平, 미신청), 조형배(趙亨培, 사건번호 다-10644), 좌경화(左卿華, 사건번호 다-298), 좌두남(左斗南, 사건번호 다-10644), 좌성인(左性仁, 사건번호 다-3588), 좌용문(左龍文, 사건번호 다-10644), 좌용운(左龍雲, 사건번호 다-8340), 좌정준(左丁俊, 사건번호 다-293), 좌중호(左中浩, 사건번호 다-10644), 지윤구(池潤九, 미신청), 진천석(秦千奭, 미신청), 차영남(車永南, 사건번호 다-10644), 채만수(蔡萬壽, 사건번호 다-419), 함봉천(咸奉千, 미신청), 허기린(許起麟, 미신청), 허낙필(許洛弼, 사건번호 다-10644), 허영필(許永弼, 미신청), 현창민(玄昌旻, 사건번호 다-10644), 홍계원(洪癸元, 미신청), 홍공백(洪孔白, 사건번호 다-398), 홍성노(洪性魯, 미신청), 홍월표(洪月杓, 사건번호 다-10644), 홍인숙(洪仁淑, 미신청), 홍진옥(洪進玉, 미신청), 홍진호(洪進豪, 미신청), 홍치봉(洪治奉, 미신청) 등 모두 218명으로 확인되었다. 조사결과, 본 사건의 희생규모는 경찰 공식문서상 249명으로 확인되지만, 진실화해위원회가 희생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희생자 수는 218명이며, 희생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희생자 수는 16명이다.

6. 본 사건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218명 가운데, 20~30대가 168명으로 77%를 차지하였다. 이는 제주4․3사건 등의 영향으로 당시 가장 활동적인 청년세대가 예비검속의 주요한 대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6%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교사(11명)․공무원(5명)․마을유지(5명) 등 사회 지도층 인물이 21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지역별 분포는 사건 지역인 한림․대정․안덕면 가운데 한림면에서 전체 58%에 해당하는 12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한림면이 상대적으로 지역도 넓고 인구가 많았던 점에 기인한다.

7. 본 사건의 희생자인 예비검속 대상자 중에는 제주4․3사건 관련자가 일부 있었으나, 이들은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 제주지역 경찰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과거 좌익활동이나 제주4․3사건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을 주요 사찰대상자로 선정하여 명부를 작성하고 동향을 사찰해 왔으며,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을 곧바로 예비검속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예비검속이 한국전쟁 직후 이른바 불순분자를 구속하여 전시 치안질서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지만, 제주에서는 제주4․3사건 관련자 중 살아남은 사람을 포함한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제거로 구체화되었음을 추정케 하며, 가해의 계획성과 의도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본 사건 희생자에 교사를 비롯하여 일본에서 유학한 지식인층과 공무원․이장 등 4․3사건과 무관한 지역사회 지도층이 일부 포함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경찰의 예비검속자 분류기준은 공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자의적이어서 구체적인 행동 여부와 무관하게 의심만으로도 군 송치대상에 포함되었다. 본 사건 희생자의 대부분은 제주4․3사건과 직접 관련 없는 사람들인 것도 이러한 사실에서 설명된다. 특히 제주4․3사건이나 좌익활동과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무고나 밀고, 경찰과의 불화, 개인적인 감정 다툼으로 예비검속되어 억울하게 희생된 경우가 많았다.

8. 본 사건의 가해측 지휘․명령계통은 크게 예비검속을 주도한 경찰과 총살을 집행한 해병대사령부=제주지구 계엄사령부로 이원화되어 있다. 먼저 경찰은 직접 총살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가해 책임주체는 아니다. 그러나 경찰의 예비검속과 등급별 분류에 근거하여 군 당국으로의 송치와 총살집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분적인 가해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

경찰측 지휘․명령계통은 대통령 이승만 → 내무부장관 백성욱․조병옥 → 치안국장 장석윤․김태선, 동 정보과장 장영복․선우○○ → 제주도경찰국장 이성주․동 사찰과장 이○○ → 모슬포경찰서장 강문식․동 사찰계장 채○○ → 한림지서․고산지서․안덕지서․두모지서․저지지서․무릉지서․대정지서 소속 경찰(주임 및 순경)로 정리된다.

다음으로 제주지구 계엄사령부, 곧 해병대사령부는 경찰의 예비검속 업무를 지휘․감독하며 예비검속자의 구속이나 석방에 관한 최종 권한을 갖고 있었다. 해병대사령부 내에서 예비검속자 처리 업무는 정보참모실에서 담당했다. 본 사건의 가해측 지휘․명령계통은 해병대사령관까지는 동일하지만, 그 이하 정보참모 및 대대급 지휘계통은 총살시점에 따라 달랐다.

먼저 1차 총살시점의 지휘․명령계통을 보면, 대통령 이승만 → 국방부장관 신성모 → 계엄사령관 육군총참모장 정일권 →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 정보참모실 정보참모 고○○ → 모슬포부대장 김○○ → ○중대장 김○○ → 선임장교 안○○ → ○소대장 박○○ → ○분대(분대장 박○○)로 이어진다. 2차 총살시점에는 대통령 → 국방부장관 → 계엄사령관 → 해군총참모장 →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 정보참모실 정보참모 김○○ → 제○대대장 김○○ → 각 분대장급 이상 하사관 다수로 연결된다.

제주지역에서의 예비검속 실시 및 관련자 집단처형이 지니는 전국성․계획성, 그리고 군․경의 지휘․명령계통을 감안할 때,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예비검속과 총살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최소한 내용을 인지하거나 묵인했다고 판단된다.

9. 본 사건의 발단이 된 경찰의 예비검속은 일제시기에 실시되다가 해방 후 폐지되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하지 않던 제도였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지역 경찰은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어떤 법령이나 규정에도 근거하지 않은 채 예비검속을 불법적으로 실시하였다. 정부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민간인 처벌의 법적 근거가 되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단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6월 25일에 발포하고, 이어 7월 8일에는 계엄령을 선포하였지만, 제주지역 예비검속 당시에는 어떠한 법령도 적용되지 않았다.

제주주둔 해병대사령부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정부의 공식적인 계엄령 선포 이전에 불법적으로 계엄령을 선포, 제주지구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행정과 치안을 관할하였다. 제주지구 계엄사령부는 법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계엄령에 근거, 예비검속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한편, 민간인을 체포 구속하여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하였다. 계엄사령부의 이러한 조치는 불법적인 것이었으며, 당시 계엄법의 관련 조항 및 규정도 위반한 것이었다. 또 계엄사령부는 제주지역의 예비검속을 계엄법에 따른 사법행위로 인식하였지만, 예비검속자 처리과정에서 계엄 관련 법령이나 포고를 전혀 적용하지 않았다. 계엄사령부는 계엄령에 따른 처리기준이나 군법회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예비검속자들을 집단 총살하였다.

10.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제주예비검속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