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제주 예비검속 사건

작성자
작성일
2010-06-14
조회수
37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민간집단희생
첨부파일
4권-8-제주 예비검속 사건.pdf [3146477 byte]

1. 양덕칠(梁德七, 다-292호) 외 194명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제주경찰서 및 서귀포경찰서 경찰 등에게 연행되어 경찰서 유치장, 제주읍 주정공장 창고, 서귀포 절간고구마창고 등에 구금되었다가 제주읍 주둔 해병대사령부 산하 병력에 의해 1950년 7월 중ㆍ하순경, 그리고 약 한달 후인 8월 중순경에 제주읍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및 산지항 부근 바다에서 집단총살 또는 수장당하였다.

2. 위 사건의 경위를 보면, 1950년 6월 25일 제주도경찰국이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금할 것을 지시하자, 제주경찰서 및 서귀포경찰서는 다시 관할지서에 예비검속 대상 주민들을 연행하여 구금하도록 지시하였다. 제주경찰서는 경찰서 유치장 및 주정공장 창고, 서귀포경찰서는 절간고구마창고에 관내 예비검속자들은 각각 구금하였다. 구금장소 경비는 경찰, 경찰 소속 의용소방대원, 해병대 등이 담당하였다.

3. 제주경찰서 및 서귀포경찰서는 사찰계를 중심으로 구금한 예비검속자들을 조사하여 등급을 분류하고 명부를 작성하였다. 예비검속자들은 종별(種別)로 사정(査定)을 거쳐 전체 DㆍCㆍBㆍA의 4등급으로 분류되었으며, 이 가운데 BㆍA급은 석방 또는 계속 구금되었고, 나머지 DㆍC급은 해병대 당국에 송치되어 대부분 총살되었다. DㆍC급으로 분류되어 송치된 예비검속자 가운데 일부는 석방되었지만, 대부분 총살 또는 수장되었기 때문에 경찰의 등급 분류는 예비검속자 집단살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해병대 당국에 송치된 예비검속자들은 최소 두 차례에 걸쳐 집단총살 또는 수장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청인ㆍ참고인 진술, 경찰 공식문서에서 확인되었다. 1차는 1950년 7월 중ㆍ하순경, 2차는 8월 중순경 이루어졌다. 제주시 및 서귀포지역 예비검속자들의 총살 및 수장 과정에서 제주도 주둔 해병대사령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해병대사령부는 당시 계엄령 상황에서 경찰의 치안 및 예비검속 업무를 직접 관장하고 있었고, 경찰로부터 예비검속자들을 인계받아 군 트럭을 이용, 제주읍 정뜨르비행장 또는 산지항 바다로 싣고 가 총살하거나 수장하였다.

5. 조사결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수는 강공호(康共浩, 다-4516호) 등 모두 195명이다.

6. 본 사건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195명 가운데 20대와 30대가 154명으로 78.9%를 차지하였다. 이는 제주4ㆍ3사건 등의 영향으로 가장 활동적인 청년세대가 예비검속의 주요한 대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5.9%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 가운데는 교사(12명)ㆍ공무원(10명)ㆍ의사(2명)ㆍ면장(1명)ㆍ이장(6명)ㆍ스님(1명)ㆍ기자(1명) 등 사회 지도층 인물도 33명이 포함되어 있다. 지역별 분포는 사건 지역인 6개 읍ㆍ면 가운데 제주읍과 애월면, 중문면에서 각각 40~5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나, 읍ㆍ면별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7. 본 사건의 희생자는 주로 경찰에서 제주4ㆍ3사건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요시찰 대상자로 관리하던 귀순자ㆍ자수자ㆍ석방자였다. 그러나 본 사건 예비검속 희생자 가운데는 귀순자ㆍ석방자ㆍ출옥자의 가족, 무고나 모략 등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따른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부의 예비검속이 법적 근거나 기준 없이 실시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예비검속자 가운데 비록 제주4ㆍ3사건과 관련된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구체적 범죄행위가 발생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과거 경력에 대한 의심이나 혐의만으로 집단살해한 것은 위법한 행위였다.

8. 본 사건의 가해관련 지휘ㆍ명령계통은 크게 예비검속을 주도한 경찰과 총살을 집행한 해병대사령부(제주지구 계엄사령부)로 이원화되어 있다. 먼저 경찰의 예비검속과 등급별 분류에 근거하여 군 당국으로의 송치와 총살집행이 이루어졌다. 제주지구 계엄사령부, 곧 해병대사령부는 최종 권한을 갖고 경찰의 예비검속 업무를 지휘ㆍ감독했으며, 예비검속자 총살도 직접 집행했다.

본 사건의 가해 관련 지휘ㆍ명령체계는 해병대사령관(신현준) → 정보참모실 → 제주읍 부대(참모장 김○○ 중령) 산하 6중대(중대장 서○○ 중위)/제주(읍) 및 서귀포 경찰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사건 관련 가해 책임을 상급 수준으로 확대하면, 지휘 및 감독책임은 해병대사령관만이 아니라, 당시 계엄사령관 및 국방부장관을 비롯하여 정부에게도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9. 본 사건의 발단이 된 경찰의 예비검속은 해방 후 폐지되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하지 않는 제도였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지역 경찰은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예비검속을 불법적으로 실시하였다. 제주주둔 해병대사령부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정부의 공식적인 계엄령 선포 이전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주지구 계엄사령부를 설치했으며, 특히 군법회의 절차조차 거치지 않고 예비검속자들을 집단 총살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법적 근거가 없는 불법적인 것이었으며, 당시 계엄법 관련 조항 및 규정도 위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