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조사보고서

국민방위군사건

작성자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작성일
2010-12-27
조회수
179
결정유형
진실규명결정
사건유형
인권침해
첨부파일
10권-11-국민방위군 사건.pdf [2355835 byte]
 

1. 1950. 12. 17. 공포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해 창설된 국민방위군은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예비병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미 창설 이전에 제주도와 경상남․북도에 49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제2국민병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던 정부는 미처 관리대책 등을 마련하기도 전에 중공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급속히 수십만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무리하게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2. 이러한 과정에서 주민통제가 강화되고, 소집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등 무리가 잇따랐다. 또한 워낙 급작스런 이동작전이었으므로, 피복, 식량, 의약품, 수용시설 등 모든 면에서 준비가 부족하여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였다.

3. 당시 유엔군이 모든 기간도로를 MSR(주 보급로)로 지정하여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샛길, 산길 등을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남하코스는 서울 장정의 경우 창경궁 홍화문 - 덕소 - 양평 - 여주 - 괴산 - 이화령(혹은 문경새재) - 문경 - 상주 - 신녕(영천) - 경산까지 온 후 부산방면, 마산방면, 진주 방면, 울산방면 등으로 나뉘었다.

4. 주요 목적지인 대구, 경산, 마산, 부산, 통영 등에 도착하면 신체검사가 행해졌다. 일단 신체가 건강한 장정은 현역병이나 국민방위군 기간병으로 선발되었으며, 여기서 불합격한 인원은 재편성되어 영천이나 울산, 사천, 진주 등 방면의 교육대로 다시 보내졌다. 거기서도 본부대와 지대로 재편성되어 인근의 수용시설로 보내졌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병약한 자는 자꾸 걸러져서 열악한 환경으로 밀려나 죽음으로 결국 내몰리는 상황이 되었다.

5. 국민방위병에게 배급이 예정된 식량은 4홉으로 전쟁포로들보다 적은 양이었다. 더욱이 치료할 의약품은 거의 전무하였다. 그런데 교육대 간부들은 그 부족한 식량을 빼돌려 부정처분․횡령을 하기 일쑤였다. 일부 교육대 간부들은 장정들에게 줘야할 주먹밥을 떼어내어 돈을 받고 팔아먹거나, 수령해온 쌀을 통째로 상인에게 팔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6. 국민방위군의 조직구성은 청년방위대의 인적 구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애초에 군 경력이 거의 전무한 대한청년단 배속장교나 청년방위대 장교 출신들에게 벼락 진급을 시켜 관리를 맡겼던 것부터 부실의 원인이 되었으며, 국민방위군 사령부 자체가 부정을 일삼았으므로 내부 감시체계마저 마비되어 교육대가 해체될 때까지 부정과 횡령이 계속되었다.

7.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수용되었던 국민방위병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배급되는 식사의 양은 갈수록 줄어들어 나중에는 계란만한 소금 주먹밥이 나왔고, 굶주림에 직면한 국민방위병들은 민가에 뛰어들어 구걸이나 약탈을 하고, 너무나 배가 고파 소나무 껍질, 땅속의 메뿌리, 정미소 벽에 붙은 왕겨, 인분을 뿌린 밭작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었다. 심지어 우물가 수채에 버려진 밥풀을 주워 먹기도 하였고, 바닷물을 먹고 사망에 이른 경우도 있었으며, 밥을 훔쳐 먹다 기간사병에게 맞아죽기도 했다.

8. 이렇게 열악한 영양공급 상태와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다수의 인원을 집단수용 하게 되자 발진티푸스 등 유행병도 급속히 퍼져 사망자가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교육대는 별 대책이 없었다. 환자가 생기면 닭장, 옹기가마, 창고 등 별도의 장소에 따로 격리했다가 죽으면 들것에 실어 아무 곳이나 묻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나마 교육대 근처에서 사망한 사람은 암매장지라도 추정할 수 있었으나, 귀향 도중에 길가에서 죽은 수많은 장정들은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사망자 명단도 가족에게 통지도 거의 없었다. 고향 친구가 살아 돌아와 가족에게 사망사실을 알리는 것이 전부였다.

9. 그러나 국가는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였다. 국방 관계자는 국회에서 유엔 구호물자는 유엔 중앙구호위원회의 정책상 민간 이외에는 배정할 수 없으며, 또 국민방위군은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원조물자를 배정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였다. 또한 제2국민병에 잘 조치하라는 이승만대통령의 지시(1951. 1. 11.자)에도 불구하고 3월 중순이 되어서야 귀향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교육대에 구호물자가 즉각 지급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10. 진실규명 대상자 진남용, 갈재원, 이현환, 김종운, 강용선, 신해문, 이평주, 한기학, 이종완, 김월봉이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사망 또는 실종된 사실이 확인되어 진실규명 되었다.

11. 국가는 1950. 11.~1951. 8.경까지 국민방위군의 소집․수용 등의 과정에서 발생된 국민방위군의 사망․실종 등 전반적 실태에 대하여 조사할 필요가 있고, 조사결과에 따라 사망자․실종자 등과 그 가족에게 공식적 사과, 위령제 실시,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및 전사 또는 순직자에 준하는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를 갖추는 등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